여백 속의 해방, 미란다 포레스터의 세계
미란다 포레스터는 영국 런던 기반의 구상 회화 작가로, 흑인여성, 그리고 퀴어 여성의 시선으로 서구 미술사 속 여성 누드화 전통을 비평적, 재구성적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이 많다. 그녀는 또한 재료에 있어서 투명하고 단단한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에틸렌 또는 플라스틱 시트를 캔버스로 사용하는 등 현실과 회화의 경계를 흐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여백과 윤곽의 미학
포레스터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눈코입이 생략된 채, 곡선과 기하학적 형태로 표현된다. 채색되지 않은 여백은 오히려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전달하며, 관람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듯 하다. 이는 여성의 몸에 부여된 사회적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상징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투명한 캔버스와 그림자
그녀는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를 캔버스로 사용해, 그림 뒤로 비치는 그림자까지 작품의 일부로 만든다. 반사되는 표면과 그림자는 화면에 물리적 깊이를 더해 다층적인 시각 경험을 제공한다.
친밀한 공간과 공동체
작품 속 인물들은 욕실, 수영장, 침대 등 사적인 공간에서 서로 기대거나 휴식을 취한다. 이 장면들은 억압과 경계를 넘어선 해방의 순간을 담고 있으며, 온전히 자신의 몸과 존재에 집중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주말, 한남동에 위치한 파운드리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란다 포레스터의 <Be Like Water> 전시에 다녀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녀의 독특한 화풍이다. 그녀는 인물의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곡선과 색채, 여백을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얼굴이 생략된 인물들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관람객들의 상상 속에서 표정을 얻는 것 같았다. 특히 욕실이나 수영장 같은 친밀한 공간에서 서로 기대거나 쉬는 여성들의 모습은 평온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작품에는 다양한 재료가 혼합해 사용된다. 유화뿐 아니라 실크스크린, 파스텔, 색연필 등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질적인 매체들이 한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물성 자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되는 듯 하다. 이는 여성성,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복합적인 사유를 유도하며, 관람자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시장 한켠이 타일 벽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수영장이나 스파를 연상시켜 작품의 주제인 ‘물’과 절묘하게 연결되어 몰입감을 극대화되었다. 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경계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장소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물을 통해 자아 인식과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을 그려내며, 자유로운 존재와 포용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듯 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기대거나 물가에 누워 있다. 그들의 자세는 느긋하고 편안하지만, 그 안에는 해방감과 취약함이 공존한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자아를 탐색해 나가는 과정을 상징하는데 포레스터는 이러한 장면을 따뜻하고 생명력 있는 색감으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미란다 포레스터의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를 넘어 그녀의 회화 언어가 다시 숨 쉬는 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서사와 정체성의 목소리에 공간을 내어주며,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전시를 관람하며 나는 그녀의 작품이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시적 언어라고 느꼈다. 이태원에 들른다면 꼭 한번 방문해보길 추천하고 싶은 전시다.